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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about Comprehension of Shanghanzubinglun

「傷寒卒病論集」에 대한 이해

  • Kang, Jung-soo (Department of Korean Physiology, College of Korean Medicine, Daejeon University)
  • 강정수 (대전대학교 한의과대학 한방생리학교실)
  • Received : 2015.12.03
  • Accepted : 2016.01.09
  • Published : 2016.02.25

Abstract

In order to understand correctly about Shanhanlun, the intension of the author from the preface must be definitely understood. Compared the preface of Shanghanzubinlun with the prefaces of other commentaries, figuring out the contents. The preface of Shanghanlun describes the time period and the production background of Shanghanlun. The publish of Shanhanlun is related to outbreak of epidemic, which is related to the war, rebellions, and the secure of trade route from west to east. The episode of Pianque in the preface is the example of the diagnosis in general, and it has connection with the four ways of diagnosis (inspection, listening & smelling, inquiring and palpation) in the last part of the preface. Shanghanzubinglun is influenced by Taoism, which is the ideology behind Huangdineijing and Shennongbencaojing. Zhang Zhongjing had studied deeply about fangshu.

Keywords

서 론

『傷寒雜病論』 16권은 東漢末 張機(字 仲景)가 저술하였으며, 漢末 戰禍로 逸失된 것을 太醫令 王叔和가 수집하고 정리하여 『脈經』 7권에 轉載하였고, 北宋의 校正醫書局 교정 후에 『傷寒論』과 『金匱要略』으로 分卷된1) 한의학 最古‧最高의 方書이고, 『상한잡병론』의 序文에 해당하는 것이 「傷寒卒病論集」이다2).

『醫方集解‧自序』에 “方이란 한 번 定하면 바꾸지 못한다는 名辭다. ⋯ 方의 祖宗은 仲景이 시작하였고, 後人들이 類를 따라 넓히고 보충하였으니 다 헤아릴 수 없으나 중경의 범위를 넘을 수는 없다.”라고 하였고3), 宋代 校正醫書局에서 의서를 교정함에 있어 “百病이 급한지만 傷寒보다 급한 것은 없다. 지금 먼저 仲景 『상한론』 10권을 교정한다.”4)라고 하여 『상한론』의 중요성을 드러냈다. 또한 『脈經‧序』5), 宋板 『傷寒論序』6), 『鍼灸甲乙經‧序』7)에 『傷寒論』의 의학사적 연원 및 중요성, 장중경 일화 등이 실려 있는데 각자 醫書의 序文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仲景 傷寒에 대한 최고의 찬사이자 跋文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상한론』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原文이 극히 간결하고 의미가 함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原本이 그대로 전해오지 않는 관계로 原文 일부에 대한 眞僞 및 編次 논란, 그리고 수많은 註釋本에 나타난 여러 갈래의 분분한 견해들로 인해 그 전체의 모습을 이해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으며8), 각 처방마다 용량이 많아 실제 임상에 적용하기가 쉽지 않다.

序文은 책이나 문학작품에 대한 저자의 작품소개로, 일반적으로 책의 제작이나 탄생배경, 본문에서 다룰 주요내용 등을 담고 있다. 현대에 와서는 서문이 비교적 이해하기 쉽게 쓰여지고 있지만 古典의 서문은 어휘나 함축하고 있는 내용이 어렵고 까다롭다.

宋代 이후 『상한론』의 문헌 및 의학적 연구 주제는 『상한론』 속에 내함된 의학적인 방법 즉, 六經辨證으로 불리는 진단 및 치료 방법을 확립하는 과정이라고 할 정도로 『상한론』에 대한 연구는 六經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가 주된 쟁점이었다9). 또한 임상적, 학술적 연구 성과도 매우 많았으나 서문을 중심으로 저자인 장중경의 입장에서 연구된 바는 없었다.

이에 먼저 「傷寒卒病論集」을 趙開美本인 『新編仲景全書』10)를 底本으로 하고, 『傷寒論本義』11), 『傷寒論譯釋』12), 『傷寒論』13), 『注解傷寒論』14) 등을 참고하여 번역하고, 장중경이 서문에 언급하고 강조했던 내용들 중, 저술 배경, 扁鵲 고사를 통한 病의 傳變과 四診의 중요성, 方術 등을 중심으로 장중경이 독자(의사)에게 알려주고자 했던 의도에 의의를 부여하고자 한다.

 

본 론

1. 傷寒卒病論集[1]15)

論曰[2] 予每覽越人入虢之診 觀齊侯之色 未嘗不慨然歎其才秀也. 怪當今居世之士 曾不留神醫藥 精究方術 上以療君親之疾 下以救貧賤之厄 中以保身長全 以養其生 但競逐榮勢 企踵權豪 孜孜汲汲 惟名利是務. 崇餙其末 忽棄其本 華其外而悴其內. 皮之不存 毛將安附焉. 卒然遭邪風之氣 嬰非常之疾 患及禍至 而方震慄. 降志屈節 欽望巫祝 告窮歸天 束手受敗. 賫百年之壽命 持至貴之重器 委附凡醫 恣其所措 咄嗟鳴呼.

厥身已斃 神明消滅 變爲異物 幽潛重泉 徒爲啼泣. 痛夫. 擧世昏迷 莫能覺悟 不惜其命 若是輕生 彼何榮勢之云哉. 而進不能愛人知人 退不能愛身知己 遇災値禍 身居厄地 蒙蒙昧昧 憃若遊魂. 哀乎. 趨世之士 馳競浮華 不固根本 忘軀狥物 危若氷谷 至於是也.

余宗族素多 向餘二百. 建安記年16)以來 猶未十稔 其死亡者 三分有二 傷寒十居其七. 感往昔之淪喪 傷橫天之莫救. 乃勤求古訓 博采衆方 撰用素問 九卷 八十一難 陰陽大論[3] 胎臚藥錄[4] 幷平脈辨證 爲傷寒雜病論合十六卷. 雖未能盡愈諸病 庶可以見病知源. 若能尋余所集 思過半矣. 夫天布五行 以運萬類 人稟五常 以有五臟 經絡腑兪 陰陽會通 玄冥幽微 變化難極. 自非才高識妙 豈能探其理致哉. 上古有神農 黃帝 岐伯 伯高 雷公 少兪 少師 仲文 中世有長桑 扁鵲 漢有公乘陽慶[5] 及倉公 下此以往 未之聞也.

觀今之醫 不念思求經旨 以演其所知 各承家技 終始順舊. 省疾問病 務在口給. 相對斯須 便處湯液. 按寸不及尺 握手不及足. 人迎跌陽 三部不

參 動數發息 不滿五十 短期未知決診 九候曾無髣髴 明堂闕庭 盡不見察 所謂窺管而已. 夫欲視死別生 實爲難矣.

孔子云 生而知之者上 學則亞之. 多聞博識 知之次也. 余宿尙方術 請事斯語.

漢長沙太守 南陽張機著17)

2. 字句解

[1] 일반적으로 序文은 自序, 原書로 되어 있으나 『傷寒雜病論』은 「傷寒卒病論集」으로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傷寒卒病論』과 『傷寒雜病論』은 같은 책으로 알고 있으나, 같은 페이지 안에 하나는 제목으로 「傷寒卒病論集」으로 기재되어 있고, 다른 하나는 『傷寒雜病論』 ㅇ16권이라고 기재된 것으로 보아 장중경이 저술했을 때는 『상한졸병론』과 『상한잡병론』은 서로 다른 醫書였을 것으로 추측되며, 병의 범위 및 양상으로 볼 때 상한잡병이 상한졸병보다 더 큰 범위이므로 『상한잡병론』이 『상한졸병론』을 포함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따라서 「傷寒卒病論集」은 『傷寒雜病論』의 서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2] 論曰은 일부 傷寒 註釋書에는 빠져 있고18), 康平本에는 集論曰 三字를 傍註로 사용했는데, 삭제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다19). 그러나 필자는 論曰 이하 序文의 전체(즉, 予每覽越人入虢之診부터 漢長沙太守 南陽張機著까지)가 인용문이라 생각한다.

[3] 『陰陽大論』을 林億은 「運氣七篇」이라 했고, 名古屋玄醫는 「陰陽應象大論」이라 하였다20). 『仲景全書‧傷寒例』21), 『外臺秘要』22)에 「陰陽大論」이 언급되어 있다.

[4] 胎臚는 羅列의 뜻이다. 藥錄은 本草書類로서 약물을 기록한 서적으로 추측되나 전해지지 않는다23). 丹波元簡은 『胎臚藥錄』은 『神農本草經』과 같다고 주장하였으나, 이 說을 근거하기 어렵고, 後漢代 의가이며 중경의 제자인 衛汎의 散失된 그의 저작을 보면 『小兒顱囟方』, 『婦人胎藏經』이 있는 것으로 보아 중경시대에도 이미 ‘胎’의 명칭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24). 또한 『金匱要略』에 「婦人姙娠病脈證幷治」, 「婦人産後病脈證治」, 「婦人雜病脈證幷治」가 별도로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부인과 의서로 추측된다.

[5] 公乘은 官名이고 陽慶은 倉公의 師이며 倉公의 姓名은 淳于意이다25).

3. 해석

論에 이르기를 내가 매번 진월인(편작)이 괵나라 태자를 진단한 것과 제나라 환후의 색을 망진한 일화를 두루 보고 일찍이 그 재주의 빼어남에 탄식해 목이 막히지 않음이 없었다. 괴이하게도 지금의 선비들은 일찍이 신묘한 의약에 머물러 방술을 정성스럽게 궁구해 위로는 임금과 친척의 疾을 고치고, 아래로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의 재앙[厄]을 구하고, 가운데로는 몸을 오래도록 온전하게 지켜서 그 삶[生]을 기르지 않고, 다만 영화와 권세를 다투어 쫓아 권문 豪家에 발뒷꿈치를 올리듯 크게 바라는 것이 부지런히 쉬지 않으면서도 조급히 서두르는 것 같고 오로지 명리에만 힘쓰고 그 末만 높게 숭상해서 꾸미지만26) 그 本은 소홀하게 여겨 버리니 밖은 화려하나 그 안은 초라하기만 하구나. 살가죽이 있지 않는데 장차 털이 어디에 붙을 수 있겠는가! (皮毛에) 갑자기 邪風의 氣를 만나서 비정상적인 급한 병[疾]과 완만한 병[病]에 닿고 근심이 재화에까지 이르게 돼서야 비로소 두려워 떨고 지조를 낮추고 절개를 굽히고 무당을 공경하고 바라지만 몸을 다해 아뢰도 하늘로 돌아가고 속수무책으로 패착만 얻을 뿐이로다. 백년의 수명을 갖고와 지극히 귀한 그릇을 지탱해야 하는데 평범한 의사에게 맡기고 의탁하니 그 조치가 방자하구나. 아! 놀랍고 슬프고 애닯도다!

차가워진 몸이 이미 쓰러져 죽고 신명은 사그라져 없어지고 변하여 異物이 되어 重泉의 어두운 곳에 잠겼는데 다만 무리들은 울부짖고 울기만 하는구나. 슬프도다! 온 세상이 혼미하여 능히 깨닫지 못하고 목숨을 아끼지 않고, 이처럼 생명을 가볍게 여기니 (저들은) 그것을 어찌 영화와 권세라고 말하겠는가! 게다가 나아가서는 능히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도 알지도 못하고, 물러나서는 자신의 몸을 사랑하지도 알지도 못하니, 우연히 災를 만나고 禍를 마주쳐도 몸이 厄地에 머무르게 되고, 몽매하고 어리석어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것이 혼이 노니는 것과 같구나. 슬프도다! 세속에 마음이 쏠린 선비들은 헛된 영화에 경쟁하듯 달리고 근본을 굳게 하지 않고 몸을 잊고 物을 자랑하니 위험하기가 얇은 얼음이 이곳에 이른 것과 같구나.

내 종족이 본래 많아 2백 명이 넘었었는데 建安 원년(196년) 이래로 채 10년이 안 돼 죽은 자가 3분의 2이고, (그 중) 상한이 열에 일곱을 차지하였다. 지난 종족의 연이은 초상[淪喪]을 애석하게 느끼고 橫夭를 구하지 못함에 상심하여, 이에 옛 가르침(古訓)을 부지런히 구하고 여러 처방을 널리 수집하였고, 『소문』, 『구권』, 『팔십일난』, 『음양대론』, 『태려약록』과 아울러 『평맥변증』을 써서 지으니[撰用] 『상한잡병론』 16권이 되었다. 비록 모든 병을 다 낫게 할 수는 없지만 거의 드러난 병은 근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내가 集해 놓은 것에서 능히 더듬어 찾을 수 있다면 (병의 근원을) 반 이상은 생각해낸 것이다. 무릇 하늘은 오행을 펼쳐서 만물을 돌리고 사람은 五常을 품부받아서 오장이 있게 된다. 經絡과 府兪는 음양이 모이고 통하지만 깊고 어둡고 그윽하고 미묘해서 변화를 다해 極하기 어렵다. 스스로 재주가 높고 앎(識見)이 신묘하지 않으면 어찌 그 이치를 더듬어 찾을 수 있겠는가! 上古에는 神農, 黃帝, 岐伯, 伯高, 雷公, 少兪, 少師, 仲文이 있었고, 中世에는 長桑, 扁鵲이 있었고, 한나라 때는 公乘陽慶과 倉公이 있었는데, 이 아래로 내려가서는 아직 듣지 못하였다.

주의하여 살펴보건대, 지금의 의사는 경전의 뜻을 염두에 두어 생각하고 구해서 그 아는 바를 널리 펼치려[演] 하지 않고 각기 가문의 기술만을 잇고 계승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옛것만을 따르고, 疾(급성 병)의 살피고 病(만성 병)을 물음에 힘쓰는 것은 말주변에 있고, 서로 잠깐 마주했다가 곧 탕약을 처방하고, (맥을 짚을 때) 寸은 짚으나 尺까지는 미치지 않고, 손은 잡되 발까지 미치지 않고, 人迎‧趺陽27)‧三部를 대조하여 생각하지[參] 않고, (맥의) 움직임 숫자와 숨을 쉬는 것이 50회를 채우지 않아 짧은 기간으로는 아직 決診(확진)을 알 수 없고, 九候는 일찍이 비슷비슷하여 구별하기 어려웠던 적이 없는데 明堂과 闕庭을 다 보고 살피지 않으니, 이른바 대롱으로 엿볼 따름이로다. 무릇 죽을 사람을 보고 살 사람을 구별해 내고자 하는 것은 진실로 어렵게 된다.

공자가 이르기를 날 때부터 아는 자는 上이고, 배워서 아는 것은 그 다음이고, 보고 들을 것이 많아서 많이 아는 자는 그 다음이라 하였다. 내가 方術을 오래도록 묵고 숭상해왔으니 청컨대 이 말을 섬기리라.

 

고 찰

1. 『傷寒雜病論』 저술 배경

『상한잡병론』 저술 배경은 시대적 배경, 의학적 배경, 문화사적 배경 등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시대적 배경으로 건안 년간에 10년도 채 못 되는 사이에 일족 200여 명 중에 3분의 2가 사망했고 그 死因의 7할이 ‘傷寒’이었다28). 장중경이 생존했을 당시 疫病이 매우 빈번하게 창궐하였음을 알 수 있고(Table 1)29), 그 발생지역도 대체로 하남‧안휘‧호북‧절강 또는 그 주변(대략 赤壁大戰이 있었던 揚子江 주변)이었으며, 南陽(현 하남성) 사람으로 長沙(현 호남성) 太守30)를 지낸 장중경도 여기에 해당되었다고 보여진다(Fig. 1)31). 또한 이 시기에 宦官들의 권력화, 官府의 暴政‧暴斂, 호족들의 토지 兼倂과 농민들의 대량파산 등으로 인해 각지에서 농민봉기(예: 黃巾賊의 亂)가 일어나서 天災 뿐만 아니라 戰禍로 인해 饑荒과 질병으로 인한 사망이 매우 많았다32).

Table 1List of an Epidemic Outbreak at Book of later Han

Fig. 1.Areas of an epidemic outbreak at later Han dynasty.

둘째 의학적 배경으로 건안 22년(217)에 발생한 역병의 참상과 이에 대한 민간에서의 해결책에 대해 曹植(192-232)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집집마다 엎어진 시체들이 아픔이 있으며, 방방마다 통곡하는 슬픔으로 가득 찼다. 어떤 경우는 문을 걸어 잠근 채 죽었고, 어떤 경우는 전 가족이 다 죽었다. 어떤 사람들은 병을 귀신이 일으키는 것이라고 여겼다. ⋯ 음양이 제자리를 잃고, 寒暑가 뒤바뀌었기 때문에 역병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백성들은 부적을 붙여서 이 역병을 막으려고 했다.”33) 그 당시에는 역병의 원인이 귀신이 아니라 자연의 이상에서 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백성들이 부적과 주문으로 병을 치료하고자 하였다. 이는 「傷寒卒病論集」에서 언급한 “降志屈節 欽望巫祝 告窮歸天 束手受敗”와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 기도‧주문‧축유 등과 같은 당시 민간에서 성행했던 민간치료법이었다.

셋째 문화사적 배경으로 2세기의 역병 유행은 결코 국지적인 현상이 아니었으며 유럽에서부터 중국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적 현상이었다. 전세계적 유행을 이끌어 낸 조건의 하나는 동서 교통로(즉 silk road)의 개설이었다. 중국‧인도 사이의 교통은 선진시대에 이미 개통되었지만 병의 이동을 위한 조건은 아직 갖추지 않았다. 숙주인 사람의 이동 양태가 변화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맥닐(William H. McNeil)은 “중국과 인도로부터 구대륙을 횡단하여 지중해 세계로 이르는 교통이 항상적이고 규칙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수천 명의 사람들이 배를 타거나 대상을 이루어 먼 길의 왕래를 거듭하자, 구세계 각 문명 사이에 전염병 전파의 양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전염병이 보편화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그 경우 최대의 한계를 긋는 가장 좋은 기본적 조건은 날마다 전염병을 발생키는 사람이라는 새로운 숙주가 얼마만큼 존재하는가 라고 하는 숙주 수의 문제였다. 이 조건이 대략 충족된 상태가 실제 기원 1세기 중에 나타났다.”라고 하였다34). 따라서 1, 2세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난 역병의 유행은 인도를 중심으로 해서 서쪽은 로마, 동쪽은 중국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전세계적인 것으로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민간인의 폐해와 혹독한 현실은 傷寒病(疫病)의 예방‧치료에 대한 해결책이 절실하게 요구되었고, 장중경은 이에 뜻을 세워 『傷寒雜病論』을 저술하는 배경이 되었다.

2. 예시를 통한 病의 전변과 四診의 중요성 언급

序의 머리에서 “予每 ⋯ 觀齊侯之色”이라 하여 齊桓侯 일화를 언급35)한데는 장중경의 의도가 숨겨져 있다. 『史記‧倉公扁鵲列傳』에 보면 扁鵲은 桓侯를 5일 간격으로 보면서 腠理→血脈→腸胃間→骨髓로 병이 전변되고 있음을 경고하였으나 桓侯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腠理에 있을 때는 湯藥‧熱熨을, 血脈에 있을 때는 鍼石을, 腸胃에 있을 때는 藥酒를 사용할 것을 제시하였다.

이는 한의학에서 병의 진입에서 매우 중요한 관점으로, 장중경이 『金匱要略‧中風歷節病脈證幷治』36)에서 “邪가 皮膚에 있으면 血虛해져 絡脈이 비게 되어 賊邪가 나가지 않고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가게 된다. 그러면 邪氣가 도리어 완만해지고 正氣는 급해져서 正氣가 邪를 잡아당겨서 喎僻‧不遂가 된다. 邪가 絡에 있으면 肌膚가 不仁한다. 邪가 經에 있으면 무거움을 이길 수 없다. 邪가 腑에 들어가면 사람을 인식하지 못한다. 邪가 臟에 들어가면 혀가 움직여 말하기 어렵고 입에서 침을 토한다.”라고 한 것은 편작의 일화를 임상적으로 구체화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素問‧皮部論』37)에 “百病의 始生은 반드시 皮毛에서 먼저한다. 邪가 피모에 中하면 腠理가 열리게 되고, 腠理가 열리면 客이 絡脈에 들어가서 머무르고, 물러나지 않으면 經에 傳하여 들어가고, 머물렀다가 물러나지 않으면 府에 전하여 들어가서 腸胃에 쌓여 저장된다.”라 하였는 바, 편작의 일화나 『金匱要略』에서의 病證傳變 설명 모두 『內經』 이론의 범위 안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또한 『內經』에서는 病位에 따라 鍼法과 治法이 달리해야 한다고 하였다. 즉 『靈樞‧官鍼』에 “병이 皮膚에 있어 항상된 곳이 없는 자는 病所에 鑱鍼으로 취하되 膚의 흰 부분은 취하지 말고, 병이 分肉사이에 있으면 病所에 員鍼으로 취하고, 병이 경락에 있어 痼痺한 자는 鋒鍼으로 취하고, 병이 脈에 있어 氣가 적어 마땅히 보해야 하는 자는 井滎이 나누어진 輸에 鍉鍼으로 취한다.”38), 『素問‧調經論』 “병이 脈에 있으면 血을 조절하고, 血에 있으면 絡을 조절하고, 氣에 있으면 衛를 조절하고, 肉에 있으면 分肉을 조절하고, 筋에 있으면 筋을 조절하고, 骨에 있으면 骨을 조절한다.”39)라고 하였는데 이것들도 편작 고사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따라서 『傷寒論』은 『내경』의 병의 傳變理論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또한 序의 머리에 “予每 ⋯ 覽越人入虢之診”도 四診의 중요성을 언급40)한 것으로 이 또한 절묘하다. 편작이 虢 태자의 尸蹶 치료가 가능했던 것은 切脈‧望色‧廳聲‧寫形만을 기대하지 않고, 病의 陰陽 소재, 病이 表로 응하는 것 등을 놓치지 않고 살핌에 있었다.

『脈經‧原序』에 “醫藥의 用은 性命을 잡아매는 바라. ⋯ 仲景은 살핌에 밝았지만 역시 形證을 살폈다. 한 터럭이라도 의심이 있으면 살피고 교정해서 확실한 徵驗을 구했다.”41)라고 한 바와 같이 장중경은 진단을 매우 중요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黃帝三部鍼灸甲乙經‧序』에 王仲宣을 진찰한 일화로 보건대, 張仲景은 실제로 진단에 매우 능했음을 알 수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42). “王仲宣이 20여세 때 仲景이 보고, 君이 병이 있어 40세가 되면 眉毛가 탈락할 것이고, 眉落한 지 半年이면 사망할 것이니 五石湯을 복용하라고 권했다. 그런데 仲宣은 복용하지 아니하고, 그 후 20년만에 과연 眉毛가 탈락되어 반년인 187일에 사망하여 仲景의 말과 같이 되었다.”

또한 序의 말미에 “省疾問病 務在口給. 相對斯須 便處湯液. 按寸不及尺 握手不及足. 人迎跌陽 三部不參 動數發息 不滿五十 短期未知決診 九候曾無髣髴 明堂闕庭 盡不見察”하여 그 당시 의사들의 부실한 진단을 질타하였다. 이에 장중경은 『중경전서』 제1권 辨脈法과 제2권 平脈法 篇에 脈의 陰陽, 趺陽脈, 寸口脈, 尺寸脈, 脈有三部 등을 설명하였고43), 桂林古本 『傷寒雜病論‧平脈法』에는 脈‧色의 관계, 闕庭脈色, 少陰脈, 姙娠脈, 奇經八脈病과 脈의 관계 등을 설명하였고44), 『金匱要略』에는 明堂 관찰법을 언급해 놓았다45). 따라서 虢太子에 대한 扁鵲의 일화는 진단을 설명하기 위한 도입이고, 복선이다.

3. 方術과 黃老思想의 관계

集에 “怪當今居世之士 曾不留神醫藥 精究方術”이라 하여 方術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余宿尙方術”이라 하여 장중경 자신도 方術에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方術은 方과 術의 합성어로,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발달하였으며, 현상 사이의 관계를 체계적으로 분석하여 탐구한다는 점에서 서양의 과학에 가장 가까운 학문이다. 方은 일이나 사물에 대해 정확히 들어맞는 해결책을 뜻하고, 術은 관측을 통한 예측을 기본으로 하는 기술들을 뜻한다. 方에 해당하는 것들로는 經方(의술)‧房中(성생활)‧神仙(불로장생법) 등이 있으며, 術의 범위에 들어가는 것들로는 오행‧천문‧역법‧관상‧점술 등이 있다. 방술은 처음에는 도교에서 신선에 이르는 방법을 이르는 말이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음양오행설‧천문‧역법‧의술‧관상‧점술 등의 철학‧과학‧의사과학적 학문들이 방술의 범위에 통합되었다46).

張仲景이 생존해 있던 漢代는 사회적으로 儒家 뿐만 아니라 陰陽家思想, 黃老道家思想, 方士, 神仙術도 행해졌다. 黃老思想은 老子의 政治論이다. 사람들은 老子를 道家라고 하였고 일부 道家者類는 仙을 구하고 採藥하는 方士들이었다. 이들이 대부분 도가에 의탁함에 따라 도가는 점차 종교적인 길을 걷었고, 後漢末에는 종교적 색채가 더욱 농후해져 求神鍊丹 이외에 중국의 많은 전통적인 巫術을 가미하여 미신적인 면이 더욱 깊어졌고 갈수록 넓게 流布하였다47).

도가사상은 『황제내경』의 양생론과 황노사상, 『신농본초경』의 연년익수, 불로장생설 등에 드러난다. 황노사상은 『황제내경』의 주된 사상으로 한의학의 양생법이 無爲自然과 天人相應으로 대표된다48). 爐火사상49)은 외단적으로는 『신농본초경』, 『본초강목』과 같은 본초 분야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본초학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丹砂와 雲母, 石硫黃 등을 이용한 丹藥들이 방제에 이용되면서 한의약의 범위를 넓히는데 크게 기여하였다50).

한의학을 대표하는 서적으로는 『황제내경』, 『신농본초경』, 『난경』, 『상한론』을 꼽을 수 있다. 이 중에서 『황제내경』은 의약의 원리와 침구의 구체적인 내용이 황노학과 도가적 관점에서 서술되었다. 반면에 『신농본초경』은 전형적인 도가적 관점의 본초서적으로 외단술의 대표적인 약물인 丹砂가 첫머리에 등장하고, 많은 약물의 성질이 불로장수와 연년익수에 초점을 맞춰 분석되었다. 한의학을 대표하고, 수많은 의가들이 醫經으로 받들었던 두 서적이 전형적인 도가사상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은 한의학의 뿌리가 仙道에서 유래되었다는 주장51)에 타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근거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관점이 항상 환영받지는 않았다. 조선후기 李濟馬에 의해 저술된 『동의수세보원』이나 18세기 일본의 대표적인 고방파인 요시마스 토도(吉益東洞)가 저술한 『醫事或問』 등을 보면 『상한론』의 처방과 원리는 믿고 따를 수 있지만, 『황제내경』을 위시로 한 도가성향의 의서는 참고만 할 뿐 의학의 본질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52).

하지만 황노사상과 도가학설은 한의학의 중요한 생리학설인 장부학설, 경락학설이 처음 비롯된 근원이고, 孫思邈, 陶弘景과 같이 의학과 내단수련을 함께 했던 이들이 실제 많았다는 점과 『동의보감』이 身形‧精‧氣‧神이라는 기본 구조에서부터 도가적인 관점에서 저술된 점으로 볼 때 한의학이 갖는 도가적 근원과 도가의학의 예방의학적 가치가 만들어낸 결과로 추측할 수 있다53).

方術은 方書로 대변된다. 序에서 밝힌 바와 같이 『傷寒雜病論』은 『素問』, 『九卷』, 『八十一難』, 『陰陽大論』, 『胎臚藥錄』 등 漢代 이전의 의학사상을 총결한 經方을 대표하는 方書다. 同篇에 “上以療君親之疾, 下以救貧賤之厄, 中以保身長全 以養其生”이라 한 것은 『신농본초경』에서 “上品 120종은 君으로 養命을 主하고 無毒하여 多服‧久服하여도 사람을 傷하지 않으므로 輕身益氣 不老延年을 바라는 데는 이것을 用하고, 中品 120종은 臣으로 養性을 主하며 有毒과 無毒이 있으므로 참작하여 用하고 病을 調하고 虛羸를 補하는 데는 이를 用하고, 下品 125종은 臣으로 治病을 主하며 多毒하므로 久服하여서는 안 된다. 병을 治癒하는데는 이를 쓴다.”54)라고 한 것과 같은 인식방법이라 하겠다.

또한 『傷寒論』에 수록되어 있는 모든 처방에는 桂枝湯方과 같이 ○○湯方으로 기재되어 있다. 이는 方術을 추구하는 장중경의 의도라고 생각된다.

한편 方士는 방술을 닦는 사람, 깨달은 사람55), 신선의 술법을 닦는 사람으로 求仙‧煉丹(주문‧주술)‧祈禱 등 여러 가지 仙術을 행하던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 직업은 주나라에서부터 시작되어 秦漢 때에 이르러 점차 번성하였다56). 方士에 대한 언급이 『黃帝內經』에 「五臟別論」과 「至眞要大論」에 있는 것으로 보아 方士가 성행하던 漢代 이전 (황제내경이 成書될) 시기에도 활동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결 론

「傷寒卒病論集」을 번역하고, 장중경이 언급한 내용들 중 저술 배경, 扁鵲 고사를 통한 病의 傳變과 四診의 중요성, 方術 등을 중심으로 고찰한 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일반적으로 『傷寒卒病論』과 『傷寒雜病論』은 같은 책으로 알고 있으나 같은 醫書가 아니다.

장중경이 『상한잡병론』 저작은 첫째 시대적으로 하남‧안휘‧호북‧절강 일대에 발생한 疫病, 饑饉과 같은 天災 뿐만 아니라 宦官의 권력화, 官府의 暴政‧暴斂으로 인한 농민 봉기, 둘째 의학적으로 기도‧주문‧축유 등과 같이 巫術을 믿고 따르는 민간치료법 성행 및 민간인의 의료에 대한 無知, 셋째 문명사적 배경으로 동‧서양의 교통로(즉, 실크로드)의 개설로 인한 교역증가로 숙주인 사람의 이동이 원인이 되었다.

편작의 고사에 나타난 병의 전변과정 즉, 腠理→血脈→腸胃→骨髓로 이어지는 病의 傳變이 장중경이 주장하고자 했던 핵심 내용이다. 구체적으로 『상한론』에서는 腠理, 絡, 經에 병이 들었을 때의 病證을 주로 설명하였고, 『금궤요략』에서는 腸胃, 五臟에 병이 들었을 때를 주로 언급하였다. 또한 寸尺‧手足‧人迎趺陽‧三部‧明堂闕庭 등 인체 모든 부위를 소홀함없이 진찰할 것을 주문했으며, 『상한잡병론』에 이들 내용을 수록해 놓았다.

『상한잡병론』에는 『황제내경』과 『신농본초경』에 면면히 흐르는 도가사상을 내포하고 있다. 또한 장중경이 생존한 漢代에는 사회적으로 儒家 뿐만 아니라 陰陽家思想‧黃老思想‧神仙術 등이 행해졌다. 서문에 장중경은 ‘方術을 宿尙하였다’라고 하였는 바, 方術이 『상한론』과 『금궤요략』의 처방에서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확인하고자 처방을 하나하나씩 살펴보았으나 그 기전과 연유는 밝히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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