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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n The Army Reserve Officers Training Academy during the Korean War

6.25전쟁 시기 육군예비사관학교에 관한 연구

  • 박종현 (대전과학기술대학교 국방과학군사학과)
  • Received : 2024.11.29
  • Accepted : 2024.12.17
  • Published : 2024.12.31

Abstract

The Army Reserve Officers Training Academy(TAROTA) was a military educational institution that trained reserve officers during the Korean War, and played a big role in the development of the Korean military, although its history was short. However, research has been lacking because it has not received much attention from academia or the public. In this study, we conducted additional verification on the three topics that were not covered in previous studies: the legal status, legitimacy, and role of the TAROTA as a reserve force. As a result, the TAROTA had sufficient legal basis and secured its own legitimacy. In addition, it trained reserve officers and supplied them as key officers of the 5th Army Reserve Corps, and some provided opportunities to re-enter the training course for active duty officers. This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the TAROTA as a reserve force.

육군예비사관학교는 비록 짧은 역사였지만 6.25전쟁 시기 한국군의 예비역 장교를 양성하던 군사교육기관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전사적(戰史的) 가치가 있다. 그러나 육군예비사관학교에 대해서는 학계나 세간에서 크게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다행히도 최근 들어 그 연구가 진행되었으나 아직은 미미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본 연구에서는 선행 연구에서 논리적인 설명이 부족한 세 가지 즉, 육군예비사관학교의 법적 지위, 정통성, 예비전력으로서의 가치에 대해 추가적인 검증을 하였다. 이를 통해 육군예비사관학교는 국군조직법 제13조에 충분한 법적 근거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고, 육군예비사관학교만의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더불어 육군예비사관학교는 양질의 우수한 예비역 장교를 양성하여 육군 예비5군단의 기간장교로 공급하였다. 그 중 일부는 현역 장교 양성 과정에 재입교할 수 있도록 선택의 길을 제공하였다. 이는 전형적인 예비전력으로서 육군예비사관학교의 역할에 방점을 찍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본 연구를 기반으로 육군예비사관학교에 관한 연구가 한층 더 활발하기를 기대한다.

Keywords

1. 서론

추측하건대, 6.25전쟁 시기 한국군의 육군예비사관학교는 일본 제국주의가 설립한 ‘육군예비사관학교(IJAROCS; Imperial Japanese Army Reserve Officers’ Cadet School) 제도’를 여과없이 차용 한 것이라는 인식 때문에 긴 시간 동안 세간의 이목을 집중받지 못했을 것이다.

육군예비사관학교에 관한 선행 연구는 시ㆍ공간적으로 흩어져 있던 역사의 퍼즐을 편년체식으로 정리했다는 구조적 특징이 있다. 그 과정에서 제한된 사료를 분석하여 육군예비사관학교의 존재를 역사의 그늘 밖으로 추출하였다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연구 성과로 평가 된다.

이와 더불어 한국노무단(KSC; Korean Service Corps)의 요구를 성공적으로 충족하였다는 점 또한 군사적 가치로 인정받을만 하다.

이러한 선행 연구의 결과는 육군예비사관학교에 관한 후속연구에 방향성을 제시하는 중요한 초석(礎石)이 되겠지만, 다음과 같은 몇 가지는 논리적인 설명이 충분하지 않아 추가적인 검증이 필요하다.

첫째, 육군예비사관학교 창설의 법적 근거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조직이 존재하는 목적에 정당성을 보장받고, 합법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법적 근거가 분명해야 한다. 그러나 육군예비사관학교는 이전에 존재했던 국민방위군사관학교나 호국군사관학교와는 다르게 창설에 관한 법적 근거를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둘째, 이 사관학교의 정통성에 논란이 있다. 육군예비사관학교는 동문회(이하 예우회)를 결성하는 과정에서 출신 구분 없이 모든 예비역 장교를 동문으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포용적 시도가 지금에 와서는 예비역 장교 양성 과정의 질서를 파괴한 결과로 나타난다.

셋째, 예비전력의 일부로서 육군예비사관학교의 역할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예비역 장교로 임관한 육군예비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은 주로 한국노문단에 배속되었지만 많은 수는 당시 전선에 부족한 초급장교의 보충을 위해 현역으로 신분을 전환하는 과정을 선택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전형적인 예비전력으로서의 모습이지만 이를 관심깊게 살피지는 않고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선행연구에서 충분히 검증하지 못한 몇 가지를 논리적으로 분석하여 연구의 성과를 진일보시키고, 6.25전쟁에서 육군예비사관학교 예비역 장교들의 숭고한 가치를 재조명는 데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먼저, 육군예비사관학교가 형성되었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를 파악한다. 그리고 6.25전쟁을 기점으로 한국군의 예비역 장교 양성 제도가 어떠한 경로를 거쳐왔는지 탐색한 후, 육군예비사관학교까지 도달하는 과정을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이를 종합하여 육군예비사관학교에 관해 설명이 부족한 몇 가지를 체계적으로 논의한다.

또한, 연구의 사실적 관계를 논리적으로 견고히 하고자 문헌연구방법을 선택하였고 지금까지 가공되지 않았던 1차 자료를 발굴하여 객관적인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이미 공개된 2차 자료는 가급적 회피하였다.

본 연구의 진행을 위한 분석의 틀은 다음 (그림 1)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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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분석의 틀

끝으로, 가독성을 높이고 용어의 혼선을 방지하기 위해 예비역 장교를 출신별로 구분하여 명칭을 달리 하였다. 예를 들어 호국군사관학교 출신을 ‘호국장교’, 청년방위간부훈련학교 출신을 ‘청방장교’, 국민방위군사관학교 출신을 ‘방위장교’, 육군예비사관학교 출신을 ‘예사장교’로 각각 표기한다.

2. 시대적 배경

2.1 중공군의 개입과 신(新)예비대 구상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개시된 6.25전쟁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조인(調印)될 때까지 3년 1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그동안 피아는 38도선을 각각 3회씩이나 넘나들며 남으로는 낙동강, 북으로는 압록강까지 폭넓게 전선을 형성하여 국토의 80%에 달하는 지역을 전장화(戰場化)하였다.

이 가운데 예상하지 못한 중공군의 개입으로 통일의 기대는 좌절되었고, 전선은 다시 서울 이남으로 형성된다. 다행히도 아군은 재반격 작전을 통해 38선 일대를 회복하였으나, 정전협정까지 고지 중심의 치열한 전투를 치러야만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쟁의 장기화를 예견한 한국군은 예비전력의 안정적인 확보가 필수적인 과제로 부각되었다.

사실상 한국 정부는 6.25전쟁 이전에만 해도 충분한 예비대를 확보하고 있었다. 1950년 5월 12일 육군본부 직할부대로 20여 개의 단(團)으로 구성된 ‘청년방위대’가 그것이다.

다만, 아쉽게도 청년방위대는 군사조직으로서 틀을 갖추기도 전에 6.25전쟁을 맞이하여 정상적인 군사 활동을 수행하지는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청년방위대는 군과 경찰을 도와 후방지역 방어작전에 기여한 사례는 우수하게 평가되어야 한다.

요컨대, 처한 상황의 시급성을 인식한 한국 정부는 청년방위대를 근간에 두고 새로운 예비대 창설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에 국민방위군설치법(법률 제172호, 1950. 12. 21.)을 제정하고, 병역법(법률 제41호, 1949. 8. 6.) 제8조에 따라 제2국민역인 17세부터 40세까지의 남성을 징집하여 국민방위군을 창설한다.

그러나 국민방위군은 징집 과정에서부터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었고 특히, 간부들의 부정행위가 심각한 사안으로 부각되면서 종국에는 조직의 해체 위기까지 다다른다[1].

2.2 미 제8군의 한국노무단 창설

1950년 7월 초,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은 서부축선을 책임졌으며 이 구역은 한국군이 담당했던 중부 및 동부축선에 비해 비교적 도로망이 발달한 곳이었다. 그러나 대부분 전선부대가 산악지대에 위치하여 있었기 때문에 보급추진의 어려움이 있었다. 미군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현실성있는 대안으로 현지인들을 노무자로 고용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미군이 험준한 산악 지형에서 보급품 추진을 위해 현지 민간인을 활용하는 것은 6.25전쟁이 처음은 아니다. 이미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아시아ㆍ태평양지역에서 유사한 방식으로 운용한 경험이 있다.

6.25전쟁에서도 동일하였다. 미군이 주도가 되어 민간인운반단(CTC; Civilian Transportation Corps)을 창설하였고 이들에게 전선까지 보급품 운반을 책임지게 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지속됨에 따라 노무자들의 이탈이 빈번해지면서 지금의 민간인운반단은 비효율적이라는 점에 공감대가 형성된다. 이것은 곧 1951년 6월 한국노무단의 조직이 현실화되는 요인이다.

미 제8군은 1951년 2월 12일부터 몇 차례에 걸쳐 현재 운용 중인 민간인운반단의 노무자를 군사 조직의 기능을 갖춘 국민방위군으로 대체해 줄 것을 한국 정부에 요청하였다. 이를 한국 정부가 동의함으로써 한국노무단의 창설은 가시화된다[2][3].

공교롭게도 이 시기는 국민방위군 사건이 사회적ㆍ정치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상황이었으며 한국 정부 입장에서는 미 제8군의 이러한 제안을 매우 긍정적인 대안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국민방위군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을 해소하고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계기이기도 하였다.

한국노무단의 창설 이전인 1951년 1월 4일, 한국정부는 예비대 확보 차원에서 마산에 150여 명의 예비역 소위와 5,000여 명의 예비역 사병만으로 구성된 제101예비사단을 창설한다[4].

이를 주축으로 같은 해 5월 5일에는 경남 울산과 창녕에서 제103노무사단과 제105노무사단이 육군 예비5군단(이하 예비5군단) 예하 부대로 창설되었다.

제101노무사단은 이로부터 얼마 후인 6월 9일 경기도 의정부로, 제103노무사단은 6월 16일 강원도 양구로, 제105노무사단은 이보다 한 달가량 빠른 5월 13일 경기도 청평으로 각각 이동하여 한국노무단 예하 부대로 편성되면서 미 제1군단, 미 제10군단, 미 제9군단을 지원하였다[5].

추가적으로 미 제8군은 1952년부터 한국군 제2군단과 제1군단을 지원하기 위해 4월 1일 부로 화천에서 200노무여단을, 1953년 1월 24일 부로 속초에서 100노무여단을 창설한다[6].

이러한 과정에서 만들어진 노무사(여)단의 승인병력은 다음 <표 1>과 같다[4].

<표 1> 노무사(여)단 승인병력 단위 :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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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주목할 점은 예비역 장교는 소대장을 맡았고, 현역 장교는 중대장 및 대대급 이상 부대의 지휘관 및 참모 직위에 편성되었다는 것이다. 하사관 역시 대부분이 예비역이었으며, 노무자는 민간인운반단 출신과 국민방위군 사병이 주를 이루었다.

3. 6.25전쟁과 예비역 장교 양성

3.1 6.25전쟁 이전 예비역 장교

3.1.1 배속장교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예비역 장교 신분의 배속장교는 두 가지 형태로 존재했다. 첫 번째는 학도호국단의 배속장교이다. 학도호국단은 문교부가 주도적으로 1948년 10월 말부터 창단 준비를 시작하여 1949년 초에 완성된 조직이며 일종의 예비대이다.

중등학교 이상의 각급 학교에 편성된 학도호국단에는 학생들에게 군사훈련을 지도할 교관이 필요했지만 현역 장교를 배치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1948년 12월 26일, 문교부(現 교육부)는 국방부와 협의 끝에 일부 체육교사를 교련교사로 활용하는 계획 안을 수립하였다. 국방부는 이를 수용하여 392명(제1기 236명, 제2기 156명)의 배속장교를 예비역 소위로 임관시켰다[7].

또 다른 형태의 예비역 장교는 준군사조직인 대한청년단 단원들의 군사 훈련을 담당하던 배속장교이다. 대한청년단이 선발한 720명의 간부는 육군보병학교에서 40일간 교육 후 예비역 소위로 임관한 후 대한청년단 각 지부에서 교관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들 배속장교는 대한청년단을 모체로 하여 만들어진 청년방위대의 빠른 확장에도 기여하였다.

이 외에도 여자배속장교는 여자학교의 교련을 담당했으며, 그 인원은 32명이었다. 이들은 '배속장교 제3기'로 명명되었다. 그러나 여자배속장교는 본 연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므로 논의에서 제외한다.

배속장교로서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던 예비역 장교들 중 일부는 청년방위대가 창설되면서 고급간부로 진출하거나 6.25전쟁 기간 중 육군보충장교령(대통령령 제382호, 1950. 08. 28.)에 따라 현역으로 전환되었다.

3.1.2 호국군사관학교

국군조직법(법률 제9호, 1948. 11. 30.) 제12조에 따라 창설된 호국군은 국군의 전력 보강을 위해 정규군 부대에 준한 편성을 하였다. 제1여단을 비롯하여 5개여단으로 구성된 호국군은 서울 등 전국 5개 주요 도시에 주둔하였고 장교(호국장교) 양성을 위해 호국군사관학교를 두고 있었다.

호국군사관학교는 1949년 3월 4일 창설 당시에는 호국군간부훈련소였으나 이후 호국군간부학교를 거쳐 지금의 교명으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1949년 8월 31일 복잡한 정치적인 문제로 인해 해체된 호국군과 더불어, 호국군사관학교 역시 1,026명의 호국장교를 배출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국장교들은 3차에 걸쳐 총 640명이 현역으로 편입한다. 먼저, 병역임시조치령(대통령령 제52호, 1949. 01. 20.) 제4조에 따라 290명이 초등군사반 제1기와 제5기를 수료하면서 현역 소위로 임관하였고, 2차에서는 150명이 1950년 5월 23일 초등군사반 제7기로 입교하였으나 6.25전쟁의 발발로 한 달 만에 임관 후 전투에 참가하게 되었다. 3차는 200명이 육군보충장교령에 근거하여 전쟁 중 소집 또는 지원을 통해 현역에 편입한다[8].

3.1.3 청년방위간부훈련학교

1948년 12월 19일, 한국 정부는 호국군의 해체와 동시에 병역법(법률 제41호, 1949. 08. 06.) 제77조에 따라 전국에 흩어져 있던 청년단체를 규합하여 대한청년단으로 창설하고 예하에 청년방위대를 두었다.

청년방위간부훈련학교는 청년방위대의 기간장교(基幹將校) 양성을 목적으로 1949년 12월 1일 충남 온양에서 창설하였으며, 졸업한 청방장교들은 청년방위대의 지휘관 및 참모로서 임무를 수행하였다. 6.25 전쟁 기간 중에는 많은 수가 육군보충장교령에 따라 현역으로 전환하였다.

국방부 문헌에 의하면 청년방위간부훈련학교는 1950년 6월 10일에 폐교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신뢰하기 어렵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대한청년단의 공식적인 해체는 1953년 9월 10일 6.25전쟁의 정전협정 직후이다. 전쟁 기간 동안 조직적인 활동을 하지는 못했지만, 국민방위군 창설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군ㆍ경과 함께 후방지역에서 공비 소탕작전과 치안 유지 등의 활동을 했다는 문헌적 근거도 찾아볼 수 있다. 즉, 청년방위대가 전쟁 중에도 계속 존속했음을 시사한다.

둘째, 당시 여러 신문 매체에는 1950년 11월 25일에 청년방위간부훈련학교 제6기 후보생이 입교식을 가졌다는 보도 내용이 게재되었다. 이는 청년방위간부훈련학교가 아직도 폐교되지 않았음을 뒷받침하는 증거이다[9][10].

“청년방위(간부훈련)학교 제6기생에 대한 입교식은 이십오일 하오 1시부터 동교 교정에서 사령관 김윤근 준장을 비롯한 군관민 내빈 다수 임석하에 성대히 거행되었다.(생략)”

따라서 문헌 기록과 언론 보도를 종합했을 때, 청년방위간부훈련학교는 6.25전쟁 중에도 존속하면서 청년방위대의 기간장교를 양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제6기 일부는 신편(新編)된 국민방위군사관학교 제1기로 편입되었다는 사실 또한 이를 입증한다.

3.2 6.25전쟁 기간 중 예비역 장교

3.2.1 국민방위군사관학교

주지하는 바와 같이 1950년 10월, 중공군의 참전은 전쟁의 흐름을 역행하게 만들었다. 아군은 다시 서울을 포기하고 후방으로 후퇴해야만 했고 전쟁의 장기화를 예상한 한국 정부는 안정적인 예비대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국민방위군을 창설하였다.

그 규모는 정규 상비사단을 1:1개념으로 지원이 가능하도록 15개 사단과 51개 교육단으로 구성하였고 병력은 약 50만 명을 보유한 상태였다. 이는 과거 호국군의 편성과 유사한 구조이다.

국민방위군은 예하 부대에 필요한 장교(방위장교)를 양성하는 데 목적을 두고 충남 온양에 국민방위군사관학교를 창설하게 되는데, 해체까지 총 3개 기수, 3,100여 명을 배출하였다[11][12][13]. <표 1>은 국민방위군사관학교의 기수별 임관 현황을 나타내고 있다.

<표 2> 국민방위군사관학교 임관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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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기는 청년방위간부훈련학교 제6기 출신 100여명을 주축으로 구성하였고, 제2기부터는 순수 민간인까지 모집의 폭을 확대하였다.

1개월의 교육기간을 거쳐 임관한 방위장교들은 국민방위군 예하 부대에 지대장 또는 참모장교로 보직되어 후방지역작전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치욕스러운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인해 이들의 명예 마저도 실추되었다.

국민방위군 사건이 발생한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는 군 경력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리더십까지 부족한 청방장교 출신들에게 특별 진급을 시켜 국민방위군의 주요 직위에 임명한 것이며, 결정적인 이유로 지목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방위장교들의 자질 문제는 추후 국회에서 육군예비사관학교라는 새로운 예비역 장교 양성조직을 논의하는 과정에 중점으로 거론된다.

결국, 국민방위군은 1951년 5월 12일 부로 국민방위군설치법이 폐지(법률 제195호, 1951. 5. 12.)되면서 예비5군단과 육군예비사관학교로 재편된다.

여기서 방위장교의 대다수는 예하 사단에 잔류한 상태에서 일부는 후일 육군예비사관학교에 재입교하거나 현지에서 예비역 장교로 신분을 전환한다.

3.2.2 육군예비사관학교

육군예비사관학교의 공식적인 존속기간은 1951년 5월 5일부터 같은 해 10월 15일까지 약 5개월 동안이다. 이 기간은 육본일반명령 제51호(1951. 05. 02)에 따른 행정적인 날짜를 기준으로 한 것이며 실제 창설일은 4월 15일이다. 이날은 국민방위군사관학교가 폐교되고 동시에 육군예비사관학교 후보생 제1기의 입교식이 있던 날이기도 하다.

국민방위군사관학교의 교사가 있던 부산 범어사에서 제1기 입교식을 마친 육군예비사관학교는 5월 3일 학교 이동 명령에 따라 경북 경주고등학교에 도착한다. 비로소 새로운 교사로 이전한 육군예비사관학교는 예비역 장교(예사장교) 양성을 본격화하였다.

제1기 후보생의 경우 국민방위군사관학교의 제3기 후보생의 1/2인 1,000여 명이 입교하여 930명이 임관하였으며 제4기까지 총 2,134명이 임관하였다[14]. 이를 정리하면 <표 3>과 같다.

<표 3> 육군예비사관학교 임관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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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제1기는 전원이 방위 장교 3기 출신들로 구성되었다. 제2기부터 제4기까지는 예비5군단 예하 사단에 복무하던 방위장교를 선별하여 입교시켰다.

이와 같은 현황은 육군예비사관학교 출신자들의 예비역 장교 명부, 복무기록 확인서, 출신별 장교 군번체계 그리고 각종 증언록을 대조하여 분석한 것으로써 선행의 연구에서 검증한 수치와는 차이를 보인다. 즉, 육군예비사관학교 출신 예비역 장교를 5,068명으로 일반화시킨 부분에 대해 재검증한 결과이다.

교육기간은 기수별로 차이가 있으나 최소 10주에서 최대 12주까지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예우회와 선행 연구자들은 18주로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으나 이는 예우회의 주장을 그대로 흡수했던 이유와 입교 일자를 면밀히 검토하지 않고 간과했기때문일 것이다.

학교의 구조적인 면에서도 (그림 2)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견고한 시스템을 갖추었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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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육군예비사관학교 조직 구성도

이와 같은 체계만 보더라도 육군종합학교나 육군보병학교의 현역 장교 양성기관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육군예비사관학교의 예비역 장교 양성체계는 현역 장교 양성기관과 견주었을 때 손색이 없을 뿐더러 지금까지의 예비역 장교 양성 제도와도 대별된다.

4. 육군예비사관학교의 몇 가지 논의

4.1 창설에 관한 법적 근거

선행 연구에서는 육군예비사관학교를 국민방위군의 해체와 한국노무단의 창설에 맞물려 급조로 만들어졌으며, 국민방위군사관학교를 그대로 이식한 조직으로 평가하고 있다.

부연하자면, 지금까지 호국군을 비롯한 예비역 장교를 양성하던 기관에서는 명확한 근거를 마련하여 법적인 지위와 신분을 보장하였다. 반면, 육군예비사관학교의 창설은 어떠한 법률적 근거가 뒷받침되었는지 분명하게 드러내지 못하였다.

따라서 육군예비사관학교가 어떠한 근거에 기반하여 존재하였는지를 규명하기 위해 법률을 제정하거나 개정하는 권한을 가진 국회의 회의록을 검토하였다.

그 결과, 1951년 5월 11일 제79차 회의록에서 육군예비사관학교 설치에 관련하여 논의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새로운 예비 병력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으로 국군조직법 제13조를 유권해석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아래와 같다[16].

“현행 국군조직법 제13조를 보면 육군에는 국방상 대통령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기타 부대를 둔다. 이러한 것이 있읍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국군조직법에다가 너 가지고 하든지 해서 이론적 근거를 우리가 발견하려고 하는 것이 예비병력 확보에 대한(중략) ,,,,, 제일 급한 문제입니다(김종회 국방위원장의 발언 중에서).”

이와 같은 법적 근거는 육군예비사관학교의 창설이 단순히 군사적 요구를 충족하기 위한 것이 아닌, 그 정당성과 정체성을 확보했음을 보여주며 무엇보다도 선행 연구가 검증하지 못한 부분을 논리적으로 설득하였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4.2 예비역 장교의 정통성 회복

대한청년단 배속장교를 시작으로 호국군사관학교, 청년방위간부훈련학교를 거쳐 국민방위군사관학교에 이르는 과정에서 육군예비사관학교의 맥이 형성된다[4]. 이를 정리하면 (그림 3)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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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3) 육군예비사관학교 계보도

6.25전쟁 기간 중 예비역 장교의 많은 수가 현역 장교로 신분을 전환했고 호국장교와 청방장교, 방위 장교는 육군예비사관학교로 흡수되는 과정을 거쳤다.

이는 지금까지 다양한 예비역 장교 제도가 시행되면서 제도적인 깊은 숙성과정을 거쳐 육군예비사관학교에 이르러 안착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정전협정 이후 육군예비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은 여타 참전 단체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명예를 선양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965년 4월 4일 총동문회가 결성되었고 2000년에는 ‘예우문집’을 발간하여 참전 경험과 역사를 기록으로 남겼다.

이 과정에서 육군예비사관학교 출신이 아닌 예비역 장교까지 동문으로 인정한 것이 예사장교를 수적으로 무분별하게 확장시킨 원인이 되었다.

다음 <표 4>는 육군본부가 제공한 ‘예비사관 복무기록 확인 회신’이라는 육군본부 공문서(1993. 12. 1, 부인 905-3035)를 근거로 예비역 장교 임관자 명단과 인사명령 날짜를 대조하여 노무사단 현지에서 방위장교가 예비역 장교로 신분이 전환된 인원을 검증한 결과이다[17].

<표 4> 방위장교에서 예비역 장교로 신분 전환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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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우회의 이러한 포용적 접근은 예비역 장교 출신의 폭넓은 통합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으나, 반대로 생각하면 육군예비사관학교의 고유한 정체성에 혼란을 야기시킬 수 있다는 문제가 수반된다. 무엇보다도 학문적 입장에서 여과없이 받아 들였다는 것은 선행 연구의 오류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본 연구를 통해 육군예비사관학교의 정규 제1기부터 제4기까지 졸업 및 임관한 2,134명만이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으로 매듭을 짓는다.

4.3 양질의 예비역 장교 양성

국민방위군의 해체를 논의하던 시기, 국회에서는 육군예비사관학교의 필요성에 대해 심각한 검토가 진행되었다. 이 가운데 국민방위군 사건에서 도출된 방위장교의 자질 문제는 뜨거운 화두였다. 국방부 역시 이를 충분히 인정하였으며 1951년 4월 28일 제67차 국회에서 장경근 국방부차관은 황성수 의원이 제기한 예비사관학교 후보생의 교육에 관한 질의에 아래와 같이 답변한다[18].

“예비사관학교라고 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국민방위군 간부들입니다. 아시다싶이 국민방위군이 실패한 것은 물론 예산이 원인도 있겠지만 그 간부에 대단히 실패가 많습니다. 간부들이 미숙하고 통솔할 힘이 적었기 때문에 지금 개선하는 데에는 무엇보다도 그 간부를 많이 우수한 사람으로 바꿔야 되겠음으로 많이 가르켜야 되겠다는 것에 착안을 했습니다.”

이러한 논의 속에는 육군예비사관학교의 후보생은 방위장교 중에서 우수한 자질을 갖춘 자를 우선 선발하겠다는 의지가 내포되어 있으며, 육군예비사관학교로 입교시키는 과정이 매우 신중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육군예비사관학교 졸업생은 대부분 한국노무단에 배속되었지만 갑종장교나 보충장교와 같은 현역 장교 양성 과정에 입교하여 또 다른 진로를 선택하였다. 그 현황을 보면 갑종장교로 672명, 보충장교로 40명이 현역 장교로 재임관하였으며 이는 육군예비사관학교 임관인원의 33%를 차지한다.

이러한 사실은 육군예비사관학교가 한국노무단의 기간장교 양성에만 목적을 두지 않았고, 부족한 현역 장교의 손실에도 자질이 우수한 인력으로 공급함으로써 예비전력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5. 결론

이상과 같이 육군예비사관학교는 시작부터 복잡한 역학관계에 놓여 있었다. 국민방위군의 해체와 더불어 어수선한 시기에 창설되면서 그 정체성이 불분명하였고, 지나치게 폭넓은 포용력은 정통성 마저 흐리게 하였다. 그러나 출신 장교들의 행보가 다양했다는 점은 육군예비사관학교의 역할에 방점을 찍는다.

본 연구를 통해 그동안 선행 연구에서 놓쳤던 몇가지를 관심있게 보면서 이를 명확하게 규명하고자 노력하였다. 따라서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6.25전쟁을 중심으로 한국의 예비역 장교 양성 과정과 배경에 대해 사실적으로 확인하였다. 이 과정에서 육군예비사관학교까지 이르는 계보를 정리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육군예비사관학교의 창설에 관한 법적 근거를 밝혔다는 데 의의가 있다.

둘째, 선행 연구에서 여과없이 받아들였던 육군예비사관학교 출신의 임관 인원을 정통성 차원에서 다시 수정하였다. 이는 곧, 육군예비사관학교의 정체성을 찾았다는 것에 매우 의미있는 시도였다.

셋째, 육군예비사관학교가 예비전력으로서 중요한 가치가 있었음을 증명하였다. 단순한 보충 개념이 아닌 전선의 부족한 현역 장교의 공백을 우수한 자원으로 대체한 조직이 육군예비사관학교였다.

결과적으로 육군예비사관학교는 한국군 역사에서 분명히 기억되어야 할 것이며 이 곳을 거쳐간 2,314명의 예비역 장교들이 청춘을 받친 숭고한 희생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본 연구에서는 6.25전쟁에서 현역이 아닌 예비역 장교들도 전장에 함께했다는 사실을 주지하는 바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예비5군단 예하의 제102예비사단과 제106예비사단에 배속된 예비역 장교들의 행적에 대해서는 제대로 확인하지는 못하였다. 이 부분은 후속하는 연구자들의 노력으로 재평가 되기를 기대한다.

References

  1. 김선호, 박동찬, 양영조, "6.25전쟁 70주년, 경기도의6.25", 경기그레트북스24, p. 161, 2020.
  2. 미8군의 국민방위군 사용 요청 서신(1951. 3. 6).
  3. 1951년 3월 6일자 미8군의 국민방위군 사용 요청에대한 답변서(1951. 3. 17).
  4. 연합뉴스, "6.25 40周기획, 지게 부대를 아십니까(상)", 1990. 06. 23일자 기사.
  5. 양영조, "한국전쟁 시 한국노무단(KSC)의 운용과성격", 한국군사학회, 제54권, p.115. 2008.
  6. 국방부, "한국전쟁 연구, 점령정책, 노무정책, 동원", 국방군사연구소, p.197, 1995.
  7. 박종상, "6.25전쟁 시 군사동원", 국방부 군사편찬 연구소, p.40, 2020.
  8. 박종현, "예비전력의 효시 호국군의 성격에 관한 연구", 한국융합보안학회, 제22권 제5호, p.133, 2022.
  9. 조선일보, "靑防訓練學校復舊", 1950. 11. 26일자 기사.
  10. 조선일보, "靑年防衛學校 入校式盛大擧行", 1950. 11. 28일자 기사.
  11. 예우회, "예우문집", 육군예비사관학교, p.524. 2000.
  12. 국민방위군본부, "국민방위군(연혁과 현황)", p.14, 1951.
  13. 부산일보, "防衛士官學校 卒業式에 李大統領 感激의 訓示", 1951. 2. 13일자 기사.
  14. 예우회, "육군 예비역 장교 명부(군번 포함)", 1965.
  15. 예우회, "육군예비사관학교 임관자 명부", 제작년도 미상.
  16. 육군본부, "일반명령 제51호(1951. 5. 2) 복사본", pp. 2301-2302.
  17. 국회사무처, '제10회 제79호, 국회정기회의속기록', p. 24, 1951. 5. 11.
  18. 육군본부, "예비사관 복무기록 확인결과 회신(육군본부, 1993. 12. 1, 부인 905-3035) 공문서 사본)".
  19. 국회사무처, '제10회 제67호, 국회정기회의속기록', p. 31, 1951. 4.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