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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 and 17th Century Joseon"> The Characteristics and Background of Gwanyo's Production of White Porcelain with "Byeol(別)" Inscription in 16th and 17th Century Joseon

조선 16~17세기 관요(官窯) '별(別)'명 백자의 성격과 제작 배경

  • 김귀한 ((재)민족문화유산연구원)
  • Received : 2022.03.30
  • Accepted : 2022.05.04
  • Published : 2022.06.30

Abstract

This paper discusses the characteristics and background of the production of white porcelain with the "Byeol(別)" inscription. Such porcelain was produced by the government-run porcelain kiln, Gwanyo(官窯), in the 16th and 17th centuries (from the 1560s to the 1640s), during the Joseon dynasty. The white porcelain ware, inscribed with either the term Byeol or "jwa(左)" and "u(右)," constituted a dual production system of white porcelain by Gwanyo starting in the 1560s. However, to date, few studies have examined Byeol-inscribed white porcelain. This, therefore, makes it difficult to achieve a comprehensive understanding of the evolution of inscriptions on the white porcelain produced by Gwanyo in the 15th to 17th centuries. Besides a regular annual stock of porcelain(年例進上磁器), Gwanyo also produced and supplied additional porcelain ware, or Byeol-gi, at the behest of the royal family or the court of Joseon. Byeol-inscribed white porcelain is a form of Byeol-gi, produced through extra firing, or Byeolbeon(別燔). According to use, Byeol-gi can be categorized as an item for national use(國用) or an item for internal use(內用). However, if the porcelain only carries the "Byeol(別)" inscription, it is difficult to identify its characteristics. Furthermore, as part of the annual production of porcelain was for the supply of Byeol-gi, and then for other purposes, the white porcelain came to be inscribed with dots indicating a change in ownership. In the 16th century, the royal family increased its consumption of white porcelain based on Shinyu Gongan(辛酉貢案), the government's fiscal reform measures. To guarantee a stable supply of exceptional Byeol-gi in light of Gwanyo's decline in the 1560s, the royal family benefited from the inscription of "Byeol." The white porcelain produced by Gwanyo was divided into annual offerings-those with the inscriptions "jwa(左)" and "u(右)"-and Byeol-gi, those with the inscription of "Byeol." They were managed separately from the commencement of production. Byeol-inscribed white porcelain was produced until the 1640s. During the mid-and late 1640s, Byeolbeon was temporarily suspended. Starting in the 1650s, the white clay used to produce the annual stock of white porcelain was sourced from regions other than those providing the clay for Byeol-gi production. The former used clay from Wonju(原州土) and Seosan(瑞山土), while the latter used clay from Gyeongju(慶州土) and Seoncheon(宣川土). According to the literature, the clay from Gyeongju and Seoncheon was much cleaner than that from Wonju and Seosan. Byeolbeon thus underwent a transformation, whereby production was separately managed, right from the stage of white clay mining. Ultimately, the need for the separate management of Byeol-gi through inscriptions diminished, resulting in the disappearance of Byeol-inscribed white porcelain.

이 글은 조선 16~17세기 관요(官窯)에서 제작된 '별(別)'명 백자의 성격과 제작 배경을 규명하는 데 목적이 있다. '별'명 백자는 1560년대 이후 '좌(左)·우(右)'명 백자와 함께 관요 백자의 이원적(二元的)인 명문 체계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별'명 백자에 관한 연구는 부족하였다. 이에 따라 15~17세기 관요 백자에 새겨지는 명문의 흐름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별'명 백자는 1560년대부터 1640년대까지 관요에서 생산되었다. 관요는 연례진상자기(年例進上磁器) 이외에 왕실이나 조선 조정의 요구에 대응하여 별기(別器)를 제작·공급하였다. '별'명 백자는 별번(別燔)을 통해 생산한 별기이다. 별기는 사용 목적에 따라 크게 국용(國用)과 내용(內用)으로 구분된다. 다만, 그릇에 '별(別)'만 표기되어 있는 경우에는 기명의 성격을 정확히 언급하기 어렵다. 연례진상자기가 별기로, 별기가 또 다른 목적으로 전용(轉用)되면서 소비와 관련된 명문이 백자에 점각(點刻)되었다. 16세기 왕실은 신유공안(辛酉貢案)을 바탕으로 백자 소비를 확대하였다. 왕실은 1560년대 관요의 운영 상황이 악화된 상황에서 최상품(最上品) 별기를 안정적으로 공급받기 위해 '별'이라는 명문을 활용하였다. 관요 백자는 생산단계에서부터 연례진상자기인 '좌·우'명 백자와 별기인 '별'명 백자로 구분·관리되었다. '별'명 백자는 1640년대까지 제작되었다. 1640년대 중·후반은 관요에서 별번이 일시적으로 정지되었다. 1659년경부터는 연례진상자기를 만드는 백토(白土)와 별기 소용 백토를 다른 지역에서 공급받았다. 당시 연례진상자기는 원주토(原州土)·서산토(瑞山土), 별기는 경주토(慶州土)·선천토(宣川土)를 원료로 사용하였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경주토·선천토가 원주토·서산토에 비해 훨씬 정결(精潔)하였다. 별번은 백토부터 별도로 채굴·관리하는 체계로 전환되었다. 따라서 특정한 명문을 통해 별기를 별도로 관리할 필요성이 감소되었고, 결국 '별'명 백자는 소멸된 것으로 판단된다.

Keyw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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